1931년 ‘전국 신인가수 선발대회’ 부산 경남지역 예선에서 1위를 차지한 고푸수는 아버지 가게에서 몰래 60원을 훔쳐 곧 있을 북경 본선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다.
그리고 결승에서 3위를 차지한 뒤 오케레코드와 계약금 1000원, 연봉 80원으로 전속계약을 맺었다.
1934년에 탄생한 ‘파 프롬 히어로즈’
오케레코드가 준비한 고복수의 데뷔곡은 ‘이원의 사랑’과 ‘타국에 산다’다.
두 곡은 발매 한 달 만에 50,000장이 팔렸습니다.
1940년 반동여자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하던 중 빅타 레코드 소속 가수 황진신을 만났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가수들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군가를 불렀다.
하지만 고복수는 그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자리를 피했다고 한다.
당시 이남영, 남인수로 높은 인기를 누렸지만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게 멋있다고 생각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고복수는 인민군에게 납치되었으나 남한군과 극적인 조우를 하게 되자 자신이 ‘도망자’ 가수 고복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끔찍한 사건을 피했습니다.
가사
외국에서 몇 년 살았습니까?
집을 떠난 지 10년, 젊음만이 늙는다
내 인생은 Fuping 같아 나 자신에 놀랐어
창문을 열고 올려다봐 저기 하늘이
올 봄 고향 앞 버드나무도 푸르다
버드나무 피리를 연주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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